상당히 많은 사람들로 전철은 부적댔다. 잠시 정차했던 전철은 갑자기 급발진을 했다. 옆에 있던 어느 여인의 몸이 내게로 쏠리면서 나의 발등을 밟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그녀에게 따질 수가 없었다. 왜 나는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가? 그녀에게는 내게 고통을 준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은 전철을 급발진 했던 운전사에게 있을 것이다.

급발진한 지하철에서 내 발을 밝게 된 여성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자유로운 의사로 내 발을 밟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지하철에서 내 발을 밟은 다른 여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자유로운 의사로 내 발을 밟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사실 자유=책임의 논리는 이미 우리의 일상적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법정에서도 결국 재판은 범죄 행위에 대해 피의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웠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재판정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항상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따진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하고 실천적인 법치글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실천이성비반> -칸트-

전체 창조물에 있어서 사람들이 의욕하고,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한낱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따. 오로지 인간만은, 그리고 그 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인간은 곧 그의 자유의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 법칙의 주체이다.

<실천이성비판> -칸트-

 

칸트는 인간처럼 자율적인 주체를 목적이라고 부르고,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타율적인 사물을 수단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 주인이 목적이라면, 노예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에서 칸트는 타인과 관계하는 윤리적 원칙을 밝혔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단순한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는 칸트의 현실 감각이다. 그는 타인을 수단으로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는 타인을 완전히 수단으로서만 보는 것에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피력한다.

관습적으로 인정된 선한 행동이라고 해도 인간의 자율적 결정이 없다면 선하다고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칸트는 혁명적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전정한 혁명성은 타인을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있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이간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Based on '철학이 필요한 시간'

'스며드는: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그 험난한 길  (0) 2015.04.01
결혼은 미친 짓이다  (0) 2015.03.29
선물의 가능성  (0) 2015.02.18
여성적 감수성의 사회를 위해  (0) 2015.02.17
집단의 조화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  (0) 2015.02.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