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무엇으로 사는가?

베버 vs 보드리야르

(차례)

1) 자본이 살아가는 방법

2) 베버: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

3) 보드리야르: "방탕한 소비는 자본을 생기롭게 만든다."


자본이 살아가는 방법


우리는 보통 전자본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를 구분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전자본주의(pre-capitalism) 시대란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건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이전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도 자본주의가 이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상업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은 자본을 통해서 잉여가치를 창출하다는 점은 서로 동일하다.

하지만 창출하는 방식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상업자본=공간적 차이를 이용한 잉여가치 창출

산업자본=시간적 차이를 이용한 잉여가치 창출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자본 운동의 일반 공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기는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는 M+△M이다.

다시 말하면 M'는 최초에 투입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초에 투입된 가치는 유통 과정에서 단지 자신을 본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변화시켜 잉여가치를 첨가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가치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야말로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해주는 것이다. "

<<자본론>>


M = Money (화폐)

C = Commodity (상품)

△M = 잉여로 남은 화폐 = 잉여가치

M-C 과정 = 생산과정

C-M 과정 = 유통과정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나 초기에 투입된 돈(M)보다 회수된 돈(M')이 많아야 한다는 점이다.


  •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잉여가치를 남기는 방법

산업자본에서는 잉여가치 획득의 장애물이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시간적 격차를 산업자본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행이란 소비자들이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대중매체를 통해,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하나의 유행으로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산업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산업자본이 잉여가치를 남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되는 결과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산업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을 소비헀던 것이다.

노동자로서 자본가에게 포섭될 수 밖에 없다.


베버: " 금욕정신이 없다면 자본의 생산력은 저하된다. "


산언자본주의만큼 인간의 삶과 역사를 포괄적으로 변화시켰던 경제체계는 없을 것이다.

역사를 거칠게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로 이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사회 =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자신의 모습을

거의 완전하게 갖추게 된 사회 그 동안 많은 서양 학자들은 "왜 서양 사회에서만

유독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공하는 데 노력을 기울렸다.

이 점에서, 베버 (Max Wever, 1864~1920)와 그의 주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베버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발달의 원인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정신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만

유독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됬었다고 주장한다.


모든 기독교도들은 <<성경>>에 맞게 자신을 검영하는 방식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사후의 삶은 정신의 삶일 것이기 때문에,

육신보다 정신적 차원이 생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저주하며, 그것을 사탄의 유혹으로까지 비난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신념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베버는 이러한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선 프로테스탄티즘이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의무로 간주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vocation'이란 단어가 직업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소명(신의 부르심)이란 의미를 함께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때문에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직업이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천직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베버는 정치적으로 볼때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띠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양대 계급이 신이 정해준 숙명인 것처럼 사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가나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임무를 '금욕'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측면에 추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금욕주의가 산업자본주의하에서 직업(천직에 대한 금욕적 행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노동자, 이 두 계급이 소비를 억제하고 생산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먹고살기 빠듯한 노동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자본가의 경우 검소한 생활을 강조할 때 자신의 지출보다 수입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이런 여윳돈을 자본가는 다시 생산에 재투자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계속 높이게 될 것이다.


물론 베버는 20세기 들어와서도 프로테스탄티즘적인 금욕주의가 유효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은 종교적 요소는 자본주의 발달을 시작하는 계기였지만,

자본주의가 본래 궤도에 오르는 순간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 모습 키워드 = 금욕주의, 재화들, 자본주의

베번 당시 자본주의의 모습 키워드 = 재화들, 자본주의, 기계

여기서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

즉, 돈으로 형상화되는 자본이 가진 힘.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정말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그의 말대로 살아진 것일까?

더 정확히 물어본다면, 20세기 자본주의는 베버의 지적처럼 종교성을 완전히 벗어나 세속화된 것일까?

베버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회철학자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 따라서 순전히 심리학적으로 보면 - 이른바 형식적으로 보면 - 돈의 소유가 허락해주는

안정과 평온의 감정, 그리고 돈으로 모든 가치들을 포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돈이

우리 시대의 신이라는 탄식에 대해 심층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방정식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기독교가 초월종교였다면 자본주의는 세속종교였던 것이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 신을 믿는 신도에게는 안정, 평화, 그리고 풍성함의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이제 신의 역할을 돈이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짐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즉, 재화들에 시선을 빼앗기느라 베버가 보지 못했던 것, 즉 자본과 돈이 가진 종교성을 짐멜은 간파했던 것이다.

기독교 시대의 금욕주의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 에너지를 아껴서 그것을 신에게 쓰려고 했던

태도였다면, 자본주의 시대의 금욕주의는 상품에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돈에 에너지를 쓰려는

태고라고 정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정신이 20세기 자본주의에서 사라진 이유는

그 자리에 돈에 개한 금욕주의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 " 방탕한 소비는 자본을 생기롭게 만든다."


1970년 베버의 입장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책이 하나 등장한다.

그 책은 <<소비의 사회>>이다.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에는 기술 개발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랄,

오히려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느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결국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산업자본은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소비를 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만 했다.

바로 이런 산업자본이 가진 아킬레스건을 통찰했던 사람이 보드리야르였던 것이다.


산업자본은 상품에 사용가치 그 이상의 것을 각인시켜 넣어야 했다.

특정 상품이 사용가치만 가지고 있다면, 소비자는 수입한 상품의 사용가치가 완전히 소멸될 때가지는

같은 종류의 상품을 더 이상 구입하지 않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 특이한 가치를 '기호가치'라고 부르면서 산업자본의 유혹 전략을 해명하려고 한다.


예들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 기능을 가지고 있고,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하게 해주는 객관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렇기에 개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의 신분이나 부유함을 나타내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 고급 아파트는 서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경우라면 다이아몬드나 골프 회원권도 자동차 혹은 아파트를 대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호의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보면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로 세탁기를 언급하고 있다.

세탁기가 도구로 쓰인다는 것은 세탁기가 '사용가치'를 가진 것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탁기는 빨래라는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준 도구이다.

하지만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이다.

이것은 사용가치와는 구분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관념적 가치를 '기호'라고 부른다.

그가 말한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소비사회에 대한 그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에게서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일종의 피해의식같은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피해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관도

함께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안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찰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은

자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를 얻는 데 있었다.

소비의 논리와 관련된 기호가치 이외에도 사용가치와 무관한 가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상징의 논리, 혹은 상징가치다.

그는 사물을 상징가치로 사용할때, 우리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물을 4가지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유용성, 거래, 신분의 논리가 자본주의 안에 포섭된 논리라면,

오직 한 가지 증여의 논리만이 반자본주의적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 핸드폰은 전화를 편리하게 할 수 있다 = 유용성의 논리를 가지면 '도구'가 됨.

20만원으로 구매할 수 있고 10만원에 중고 제품으로 되팔 수 있다 = 거래의 논리를 가지면 '기호'가 됨.

지적이고 섹시한 20대 여성을 표시한다 = 신분의 논리를 가지면 '기호'가 된다.

반면, 애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한 권의 책,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글이 속지에 깨알처럼 적혀 있는 한 권의 책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책으로 그 안에 적힌 정보를 학습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유용성 논리에 대한 거부)

헌책방에 팔려고 하지도 않고 (거래 논리에 대한 거부)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지적이란 분위기를 풍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신분 논리에 대한 거부)

오직 선물로 받은 책이 순수한 증여의 논리에 따르는 순간 '상징'이 되며,

자본주의 논리에서 가장 멀리 벌어나게 된다.

선물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을 인간으로서만,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나오는 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을 지배하는 것.

이것은 화폐와 상품의 논리로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마저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꿈이 될 것이다.

말년의 저서 <<암호>>에서 보드리야르가 세계의 모든 것을 교환 불가능한 것,

즉 일종의 선물로 보자고 역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 교환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상들만 그럴까?

우리 자신도 다른 누구와 바꿀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 아닌가?

보드리야르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에 대한 태도 변경이였다.

모든 것을 이 세계에 던져진 선물로 보자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산업자본주의로부터 우리가 점차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기 직전에 그가 남긴 유언은 너무나도 시적이고 버범하기까지 하다.

탁월한 심미적 감수성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보드리야르의 유언을 지속적으로 집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기 위해,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인간이 서로 착취하지 않고 연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보드리야르의 유언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언젠가 모든 사물, 모든 타자,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도 하닁 선물로 긍정되는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


based on 철학 vs 철학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