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ara de Lempicka, "Self portrait in the green bugatti", (1925)

"탐욕(avaritia)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돈에 대한 갈망은 지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미 돈은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돈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돌아보면 우리가 대학교와 전공을 정하는 것도, 취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것 아닌가.

돈만 있으면 여행도, 물건도, 행복도, 사랑도, 심지어 애인마저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깅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친구가, 애인이 내게 친절한 건 내게 돈이 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돈을 신처럼 숭배한다면 말이다.

결국 돈이 없다면 친구든 애인이든 모두 나의 곁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모으고 또 모은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돈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마치 신에게 헌신하느라 가족과 이웃은 돌아보지도 않는 어느 우매한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이런 딜레마,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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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저자
강신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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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 2013-11-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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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르동, "나비들", (1910)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주인공이 된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조연으로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종교와 정치적 신념 같은 관념들일 수도 있다.

주인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조연일 때 우리의 삶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신의 꿈과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조연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사랑의 위기나 비극은 모두 사랑의 정의로부터 설명된다.

우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 동등한 주인공이 아닐 때, 사랑은 비틀거리게 된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주인공으로 만들고, 남자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여자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는데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 순간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또 다른 위기는 두 사람 이외에 제 3의 것들이 조연의 자리가 아닌 주연의 자리로 떠오를 때 발생한다.

시부모가 무대를 휘두른다든가, 남녀 중 어느 한 사람의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중심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조연으로 강등되고 동시에 사랑의 기쁨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기를 지혜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유일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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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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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민, "붉은 방", (2003)


"야심(ambitio)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 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야심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시기와 관심, 그리고 찬양과 찬탄을 바등려고 한다.

나를 찬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찬양하기만 하면,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도 보석으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창 시절을 한번 돌아보자.

다음과 같은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첫 강의를 듣자마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교수의 강의가 보잘것없다는 것, 심지어는 강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교수가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교수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이 이 만큼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심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심이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칭찬해 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기와도 같다.

그러니까 강해 보여도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하고, 당연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자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전쟁이라고 할 때, 이렇게 '지피지기'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이나마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직급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야심은 더 커져만 간다.

그러면 진짜 위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결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 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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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하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이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에만 상대방도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처럼 주인은 관심을 받고, 노예는 무관심에 방치되는 법이니까.

"당신이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레토릭이지.

결코 사실을 묘사하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상대방의 뜻에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 노예의 제스처는 글자 그대로 상대방도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제스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한 나의 헌신이나 나의 자유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는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떻게 대우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미워해도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이고, 밀쳐내도 내게 안길 사람이라면 말이다.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으로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뿐이다.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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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deo Modigliani, "Christina", (1916)

소심(timor)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소심함과 대담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극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매사에 소심하게 된다.

반대로 결과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대담하게 된다.

소심함이든 대담함이든 두 감정 모두 극단적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소심함에는 미덕이 한 가지 있다.

미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심한 사람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담함에도 예상하기 힘든 후유증이 있기는 하다.

미래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대담한 사람은 비관적인 결과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댈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역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지라도, 타자는 우리의 예측이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예측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나치게 대담한 사람에게는 소심함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소심한 사람에게는 대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 대해 균형잡힌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소심함과 대담함의 중도, 혹은 중용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 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 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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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deo Modigliani, "Chrisitna", (1913-1914)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laetitia)의 정서를 쾌감(titillatio)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정신과 육체에서 모두 기쁨, 즉 쾌감은 자주 찾아오는 경험은 아니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만 우리는 쾌감을 소망할 수 있다.

섹스, 춤, 그리고 스포츠가 쾌감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춤이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섹스에서도 쾌감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와 얼떨결에 섹스를 나누게 되었다고 하자.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나 흡족하게 섹스를 즐길 수도 있다.

섹스를 마친 후 그 상대방은 완전히 다른 남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그 남자만 생각해도 전신은 기쁨으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함께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을 기쁨에 젖어들게 하는 남자가 있다.

기대감은 품은 채,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자.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섹스에 서툴 뿐만 아니라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 후 과연 이 남자를 떠올렸을 때, 여자는 기쁜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느 때 불행을 느끼는지 계속 응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정신으로 "이럴 때 자신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도 직접 몸으로 겪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Moise Kisling, "A Young Girl seated with Marguerites", (1950)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가 아니다.

이루러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한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놓아야만 한다.

심지어 목숨마저 요구하는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있는 폭퐁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 하는 것이 많아 이것 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 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했었다."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급적 다 해 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평상이 원했던 근사한 자동차를 사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Grandval Sophie, "Bird amongst flowers", (1979)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우리는 평생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타자는 너무나 쉽게 내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머리에 뭐가 묻었네요. 이리 와서 돌아봐요. 제가 털어 줄께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상의가 바지에서 빠져나와 있으면 나는 어김 없이 그에게 그 사실을 일러 준다.

이건 뒷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면을 타자는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사실 거울보다 수백 배나 더 좋은 요술 거울이 바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이 현재의 시작적인 모습만 비추어 준다면, 타인은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도 보여 줄 수 있고, 심지어 나의 내면마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던 장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나의 단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우울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발견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해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곘는가.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John Singer Sargent,"Carnation, Lily, Lily, Rose",(1885-1886)

경쟁심(aemulatio)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보통 우정은 동성끼리, 그리고 사랑은 이성끼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정과 사랑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정과 사랑은 모두 어떤 타인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자신이 과거보다 더 완전해졌다는 뿌듯함이 드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나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슬픔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정과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 혹은 정도상의 차이만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타자가 무어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개나 고양이일 수도, 혹은 슈베르트의 음악일 수도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경쟁심은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다.

우정이나 사랑의 감정에 빠지면 우리는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는 과정을 꼭 겪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면 좋을 것 같다.

싫어하지 않는 어떤 사람과 묘한 경쟁 관계에 들어갈 때, 여러분들은 우정, 혹은 심하면 사랑의 관계에 들어서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서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하긴 미워하는 사람과 경쟁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손상기, "연인", (1978)

"박애(benevolentia)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커풀이나 가족 내부의 문제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은사회적 차원의 문제에서 다루어져 왔다.

예수의 사랑도 그렇고, 싯다르타의 자비도 그렇고. 공자의 인(仁)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 제도가 관철되면서 사랑도 사적인 영역으로, 결혼 제도와 일정 정도 관게가 있는 거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든 공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겨울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우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나 부부 사이에도 사랑의 원리가 훼손되어 있는데,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연애에서부터라도 차근차근 사랑 연습을 하자.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투르게네프 Ivan S. Turgenev 1818-1883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 삶에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없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루한 삶'은 결코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비루함의 감정, 혹은 그런 저오를 강하게 띠로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부분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나자가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났다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너는 엄마를 닮아서 구제불능이야, 피가 어디 가겠니."
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슬픔의 정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과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젖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페다.
그만큼 비루함은 벗어던지기 힘든 감정이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애정과 칭찬이 있다면, 비루함도 조금씩 사라질 수는 있다.
자신을 쉽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 오랜 시절 만들어진 습관화된 슬픔을 그만큼 시간을 드여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봄 햇살이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루함이라는 고직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

Based on


감정수업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11-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주는 욕망의 인문학 “자신의 감정을 지켜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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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민, "거울과 캔버스 틀 사이에서"

"끌림(propensio)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너무나 서둘러 일찍 결혼하는 여성이 있다.

이건 그녀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 가족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은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조금만 잘해 주어도 금방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충'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여자가 있다고 하자.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정말 맛나게 잘 드시네요."라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가족을 떠나 그와 새로운 삶을 꾸리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남자와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녀 는 금방 그에게 심드렁해질 것이다.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남자보다 조금 더 잘해주는 남자가 생기면, 그녀는 금방 새로운 남자에게 또 끌리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지만 그 대가로 화려한 연예인이 되는 데 성공했던 여배우들의 경우에 대부분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파탄 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블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김정욱, "무제" ⓒ 2008, Jungwook Kim and Gallery Skape all rights reserved

"미움(odium)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사랑이라는 감정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헛소리다.

정말로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거나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한 번도 제대로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무관심일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시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미움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그래서 둘 중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야 끝날 수 있는, 한마디로 저주받은 관계다.

불행히도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게 된다.

그래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항상 처절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과 무관심한 관계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관계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움만큼 비극정인 감정이 또 있을까.

어떤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관계를 소망하도록 만들 정도로 처절한 감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미움이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감소시켜서 우리를 고사목처럼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그러니 자살하기 싫으면, 상대를 죽일 수밖에.

반대로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자살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게 될 것이다.

반대로 미운 상대를 죽인다면,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게 되는 작은 기쁨을 조금씩 되찾게 될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순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미소를 띠울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미움이라는 비극적 관계를 경험하지는 않았으니까.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Ernst Ludwig Kirchner, "View into a cafe", (1935)

"질투(invidia)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친구들의 모임에 남자친구를 데려가는 여자들이 있다.

이럴 때 그녀는 시시콜콜 남자친구에게 옷차림과 이야기 방식에 대해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사랑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일대일의 관계, 즉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두 사람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애인을 멋지게 포장한 다음에 친구들에게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친구들과 자신이 주연이고 남자친구는 잘해야 예쁜 조연 정도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모임에서 애인이 시키지도 않은 멘트를 던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멘트에 빠져든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애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피력하고, 심지어 애교마저 떠는 것 같다.

예상치도 못한 질투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질투의 감정이 클수록 그녀는 서둘러 남자친구를 데리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을 빼고 자기 친구와 자기 애인이 순간적이나마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바로 이것이다.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

그렇다고 이 여자가 다시 남자친구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힘 들 것이다.

"당신만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줘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사랑일 테니까 말이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Tsuguharu Foujita, 'Autoportrait dans l'atelier', 1926) ⓒ Foujita Tsuguharu Leonard/ADAGP, Paris-SACK, Seoul, 2014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세상에는 3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살마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이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기보다 항상 타인의 욕망을 따르려고 하니 온화하다느니 공손하다느니 하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타인의 욕망을 따르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폐인이 될 것이다.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반면 타인의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첫 번째 부류의 인간은 정말로 위험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정에서 약한 아내나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역자를 공격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첫 번째 부류의 남자를 만날때 여자들은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에 속아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조심하라!

법 없이 살 사람을 조심하라!

이건 생활의 철칙이다.

결국 우리가 가까이 해도 되는 유일한 인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니, 적과 동지가 명확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된다면, 이런 사람과는 주저하지 말고 사람에 빠져도 된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Rene Magritte, "The Tomb of the Wrestlers", (1960) Private Collection ⓒ Charly Herscovici / ADAGP, Paris 2011

"대담함(audacia)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대담한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용기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정말 용기가 있어."

이런 표현 때문에 누군가의 내면에 용기라는 것이 마치 실체처럼 있다는 착각이 벌어진다.

번지점프대에 올라갔다고 하자. 쉽게 점프대 난간에서 한 걸음 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런 번지점프대와 같은 위기 상황, 그러니까 그 점프대 제일 끝에 서 있을때,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창공에 몸을 던질 수도 있고, 뒤로 한 걸음 빼서 안전함을 도모할 수 있다.

대담하게 몸을 창공에 던지는 경우 우리는 '용기'나 '대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러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때 '비겁'이나 우유부단함'을 가진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용기가 있어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뛰어 내리는 것 자체가 용기일 뿐이고, 비겁해서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물러난 것 자체가 바로 비겁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몸을 던졌다면, 지금까지 그는 용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위기 상황,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과감하지 못하다면, 과거의 용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아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Based on '강신주의 감정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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