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Rousseau, "Carnival Evening", (1886)

희망(spes)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곳에 반드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희망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희망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이 품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음껏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다.

반면 어른들은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여러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까, 어른들은 삶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만다.

그러면서 우리는 희망에 부푼 삶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삶에 불과하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일종의 '신포도' 전략인 셈이다.

따먹기 힘드니까 아예 포도가 시다고 미리 폄하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포도를 따먹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가?

희망을 낮추거나 아ㅖ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렇 때 그냥 하루하루 매너리즘에 빠진 삶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조그만 희망들을 품어 보도록 하자.

"나는 화가가 될 거야. 멋진 우화를 그릴 거니까."

"나는 플라밍고 기타를 배울 거야."

"나는 마추픽추에 갈 거야."

"나는 키스자렛을 만나 그의 연주를 듣고 CD에 사인을 받을 거야."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내 마음에 희망은 더욱더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내 곁에 더 머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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