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현대 인문학의 고뇌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2가지이다. ‘타자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타자란 글자 그대로 나와는 다른 사람이나 나오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무엇인가 나와는 다르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차이를 느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차이의 경험은 결국 다름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낯섦과 조우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표현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타자차이라는 개념이 부각되었을까? 이것은 20세기의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 혹은 자신마의 고유한 내면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바흐보다 모차르트가 좋아.” 이렇게 강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나와는 다른 타자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장중한 바흐가 더 좋던데.” 바로 이순간이 타자와의 차이를 경험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과거 사람들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금욕이나 절욕이 성숙함의 척도처럼 기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과연 그덧들이 과거 사람들이 우리보다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여성이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녀들은 삼종지도라는 원칙을 맹목적으로 지키면서 살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에, 결혼해서는 남편이 말에,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남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경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과 욕망에 상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는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다.

과거 사람들은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국가에서든 조화를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다고 뿌듯해하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것은 그녀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실제로는 그녀가 가족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발생할 수 없다.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하나가 됨이라는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이고, 인식 가능한 태양이며, 진리로 향하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시간과 타자> -레비나스-

 

타자가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할 때, 그는 스스로 하나의 주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자의 타자성이 나로 환원 될 수 없는 타자만의 고유한 주체성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집단에 매몰되는 순간,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만의 고유성, 혹은 주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이런 체제로 발생하는 것 아닌가? 히틀러의 지배하에 있던 나치 독일은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논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레비나스가 집단성을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것이라고 규정한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이 그가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확신한다. 전체주의는 우리가 자신에게 책임의 역량, 즉 타자와 마주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시간과 타자> -레비나스-

 

어머니는 아이가 법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불행히도 그녀의 아이는 영화를 만드는 삶을 가려고 한다. 어머니에게 아이는, 혹은 아이에게 어머니는 타자가 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어도 안 된다. 반대로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어도 안 된다. 두 경우 모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타자로 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강들과 긴장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도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연히 타자와의 관계는 공감의 관계일 수도 없다. 공감은 유사한 생각과 욕망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나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관계는 책임이란 관계다. 이 관계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부단히 반응할 수 있고, 아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타자로 긍정하면서 그에 반응할 수 있다. 완전한 일치도 아니고 완벽한 분리도 아닌 관계.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그래서 그는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체주의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관계를 찾아냈다. 그의 발견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과, 그 타자에 대응할 수 있는 책임의 논리가 가장 주요하다. 그에게 있어 타자라는 범주가 주체가 집단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해주었다면, 책임의 논리는 새로운 연대성, 혹은 전체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Based on '철학이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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